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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것을 위한 기록》

– 감정이 지나간 자리, 시간의 층으로 남다

헝가리 출신 작가 티보르 사이몬 마줄라는 반복된 붓질과 지움, 덧씌움의 과정을 통해 ‘사라짐’과 ‘기억’, 그리고 감정의 잔흔이 화면 위에 어떻게 남는지를 탐색해 왔습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침묵에 잠긴 숲, 고목이 서 있는 공원, 그리고 아내 다이애나를 모티프로 한 작품을 포함해 2024–2025년에 완성된 회화들이 소개됩니다. 

마줄라의 작업은 감정이 지나간 자리를 시각적 재현이 아닌 물성과 층위로 환기합니다. 검은 제소, 버려진 팔레트 조각, 손과 붓의 병행 사용은 화면을 하나의 감각적 지형으로 구축하며, 각 작품은 고정된 장면이라기보다 축적과 소멸이 교차하는 시간의 구조로 읽힌다. 빠르게 소비되고 휘발되는 이미지의 시대에, 마줄라의 회화는 사라지는 감정의 밀도를 천천히 쌓아올립니다. 

 

이번 전시는 지나간 것을 재현하려는 시도라기보다, 사라지는 순간이 남기는 감각의 여운을 붙잡으려는 작가의 태도에서 출발합니다. 관람자는 작가가 남긴 흔적의 결을 따라가며, 각자의 기억과 감정이 겹쳐지는 조용한 내면의 풍경과 마주하게 됩니다.

마줄라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을 보여주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남겨지는가’ 입니다. 한 번 그려지고 다시 덮인 흔적은 또 다른 감각의 바탕이 되어, 화면 위에서 긴 호흡처럼 울립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저마다의 기억을 더듬으며, 잊혀진 감정을 천천히 복원해 갑니다. 

 

이번에 소개되는 작업들은 단일한 이미지의 결과물이 아니라, 시간의 층위 속에서 축적된 감정의 단면들에 가깝습니다. 덧씌워진 붓질 아래 감춰진 장면, 흐릿하게 스며든 색의 켜들은 하나의 화면 안에서 서로 겹치고 침투하며 만들어집니다. 이 접근은 기억의 방식과도 닮아 있습니다. 선명하게 떠오르기보다는 천천히, 불완전하게, 그러나 분명히 도달하는 감각입니다. 

마줄라에게 회화란 외부를 재현하는 수단이 아니라, 내면의 리듬을 따라 흐르는 감정의 구조를 드러내는 그릇입니다. 그의 작업은 고요 속에 가라앉은 시간의 감각을 되살리고, 감각과 기억을 되묻는 하나의 언어로 작동합니다. 

전시 축시

화가 마줄라의 작업실
장석 시인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다뉴브강을 젖줄로 삼는 화가는
검은 숲으로부터 흘러 와 퇴적되고 흑해로 흘러가며 소멸하는 삶을 그린다

의자가 두 개뿐인 작고 겸손한 방
서로의 강물 같은 잔을 나누며
덧없고 유한한 것들이 쌓이고
소란하게 일던 물결은 거듭거듭 덧칠되어
진실을 말하는 침묵과 영원을 얻은 아름다움이 태어나는 것을 나는 본 적이 있다

좁고 어두운 부엌에서 보잘것없는 재료로
생명의 양식을 차리려는 연금술사
그의 아내는 화폭 안에서 늘 걱정 앞에 멈추어 있다

다뉴브강에 핀 연꽃 같은 부다페스트

아름다움의 근원을 알고 싶은 이는
오래된 옛지도를 들고 골목을 뒤지며
그의 화실과 잡목숲과 다이애나를 꼭 찾아 보시길
그 안에 흐르는 강물을 


■ 시인 소개  

장석 (1957~, 부산 출생)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후, 198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사랑은 이제 막 태어난 것이니』, 『우리 별의 봄』, 『해변에 엎드려 있는 아이에게』, 『그을린 고백』 등을 출간했다.
그의 시는 사랑과 삶, 존재의 본질을 불꽃처럼 끌어안으며, “불의 시인”이라 불릴 만큼 강렬하고 고요한 시세계를 펼친다.
2024년에는 일본에서 시선집 『너는 사람의 길을 가지 말아라』가 번역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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